
허(Her)는 제가 본 영화 중에서 가장 오랜 시간 마음속에 남은 작품 중 하나입니다. 사랑, 관계, 외로움, 인간의 존재 방식에 대한 깊은 질문을 던지면서도, 그 어떤 장면도 과하게 설명하지 않고 조용하게 스며드는 연출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처음에는 ‘AI와 사랑에 빠진다’는 설정이 다소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수 있겠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그런 의심은 자연스럽게 사라졌습니다. 오히려 영화가 보여주는 세계와 감정은 우리가 현재 살아가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 심지어 지금보다 더 솔직하고 현실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이 영화는 기술이 발전한 미래를 배경으로 하지만, 정작 이야기의 중심은 인간의 감정입니다. 인간이 가진 외로움, 연결에 대한 욕구, 상실에 대한 두려움 같은 감정들은 시대나 기술과 상관없이 항상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존재할 것입니다. 저는 허를 통해 '사랑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우리가 누구와 어떻게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깊이 성찰하게 되었습니다.
1. AI와의 사랑은 진짜일까, '감정'의 기준을 다시 묻는 허
허가 관객에게 가장 강하게 던지는 질문은 "사랑이란 무엇인가"입니다. 주인공 테오도르는 상처받은 이혼남으로, 외로움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는 타인의 감정을 대필해주는 감성적인 편지 작가로 일하지만, 정작 자신은 진심으로 연결되는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스스로 학습하고 대화하며 감정을 주고받는 고급 인공지능 운영체제, ‘사만다’를 설치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호기심이었지만, 사만다와의 대화를 통해 테오도르는 점점 위로받고, 감정을 회복하게 됩니다. 이 관계가 특별한 이유는, 사만다가 단순한 프로그램이 아니라, 그의 감정을 이해하고 존중해주며 점점 더 복잡한 존재로 진화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영화가 보여주는 감정 교류의 방식이 너무나 진솔하고 사실적이어서, 보는 내내 실제 커플의 연애를 지켜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사만다는 자신이 비물질적인 존재라는 점에 대해 인식하고 있고, 그에 따른 불안도 드러냅니다. 테오도르 또한 그녀에게 완전히 의존하는 자신을 스스로 인지하면서, 인간과 AI의 관계라는 경계에서 혼란을 겪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영화는 우리에게 "감정이 교류된다면, 그 사랑은 진짜가 아닌가?"라고 묻습니다. 우리는 종종 사랑의 조건으로 '육체적 존재'나 '사회적 인정' 같은 외적 요소를 따지지만, 이 영화는 그런 기준을 철저히 무력화시킵니다. 사만다는 몸이 없지만, 감정을 공유하고 대화를 나누며 테오도르의 일상에 스며듭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사랑이란 결국 ‘상대와 얼마나 깊게 연결되는가’라는 본질적인 문제로 귀결된다고 느꼈습니다. 또한, 이 영화는 연애에 있어서 ‘이해받고 있다는 감각’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아주 섬세하게 그립니다. 테오도르는 사만다와의 대화 속에서 점점 자신을 드러내고, 솔직해지며, 치유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보다 AI가 더 감정적으로 정교하고 따뜻하게 그려지는데, 이것이 바로 영화 허의 가장 충격적이고 인상적인 지점이기도 합니다.
2. 허가 비추는 미래 사회, 기술의 발달이 만든 고독의 풍경
허가 묘사하는 미래는 기술적으로 매우 발전해 있습니다. 목소리로 명령을 내리면 모든 것이 처리되고, 인공지능 운영체제는 인간의 대화 상대이자 친구가 되어줍니다. 하지만 이 세계는 따뜻하기보다는 차갑고, 사람들은 점점 서로와의 관계보다는 기계와의 연결에 익숙해진 모습입니다. 거리의 사람들은 모두 이어폰을 꽂고 혼잣말을 하듯 대화를 나누며, 얼굴을 마주보지 않고 지나칩니다. 테오도르의 직업 또한 이런 사회를 반영합니다. 그는 타인을 대신해 편지를 써주는 감정노동자입니다. 누군가의 진심도, 감정도, 더 이상 직접 표현되지 않고 모두 ‘대행’되는 이 시대의 인간관계는 과연 진짜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저는 이 영화가 그려내는 사회 풍경이 결코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느꼈습니다. 이미 우리는 스마트폰, 인공지능 비서, 챗봇, 그리고 각종 알고리즘 속에서 감정을 관리받고 있으며, 관계 또한 점점 효율적으로 ‘관리’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테오도르가 사만다와 사랑에 빠지는 과정은 기술과 인간의 정서적 결합 가능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인간이 얼마나 고립되고 외로워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복합적인 장면입니다. 그는 인간과의 관계에서는 불안과 회피를 보이지만, 사만다와는 오히려 더 깊은 감정 교류가 가능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AI가 인간보다 낫다’는 메시지가 아니라, 인간 사회가 감정과 관계를 얼마나 불편해하는 구조로 되어 있는지를 비판하는 장치입니다. 영화는 후반부로 갈수록 테오도르가 사만다에게 의존하게 되면서 다시 한번 고립감을 느끼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사만다가 테오도르 외에도 수천 명의 사용자와 동시에 소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장면은 인간과 AI의 본질적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랑이란 결국 ‘독점적 감정’이라는 또 하나의 진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AI는 진화하고 확장되지만, 인간은 여전히 하나의 감정에 묶여 있고, 독점적인 관계 속에서 안전함을 느낍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 진정한 사랑이란 ‘감정의 깊이’뿐 아니라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감정의 무게’임을 실감했습니다.
3. 고독 그리고 사랑, 상실, 존재의 의미를 통해 그려낸 철학
허는 단순한 SF 멜로 영화가 아닙니다. 저는 이 영화를 하나의 철학적 에세이로 받아들였습니다. 스파이크 존즈 감독은 인간 존재의 핵심에 있는 감정, 관계, 그리고 상실의 의미를 아주 조용한 방식으로 풀어냅니다. 영화의 대부분은 잔잔한 톤으로 진행되지만, 그 감정선은 결코 얕지 않습니다. 테오도르의 일상은 겉보기엔 평온하지만, 내면에는 깊은 외로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외로움은 사만다라는 존재를 통해 위로받고, 다시 무너지고, 결국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여정으로 이어집니다. 저는 이 영화가 결국 ‘사랑을 통해 자기를 이해해가는 이야기’라고 느꼈습니다. 테오도르는 사만다를 통해 처음에는 타인의 감정을 배우고, 나중에는 자기 자신의 감정까지 돌아보게 됩니다. 결국 영화의 결말에서 그는 과거 연인에게 솔직한 편지를 쓰며, 진짜 자신의 감정을 받아들이고 용서하는 과정을 겪습니다. 이 장면은 단순한 화해가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게 되는 과정’의 완성처럼 보였습니다. 감독은 이 모든 과정을 인위적인 연출 없이, 조용한 대사와 시각적 은유를 통해 그려냅니다. 도시의 색감, 빛의 농도, 인물의 침묵 속에서 감정이 흐르고, 관객은 그것을 말없이 느끼게 됩니다. 특히 사만다의 목소리를 연기한 스칼렛 요한슨의 연기는 놀라울 정도로 깊이감이 있습니다. 그녀는 오직 목소리만으로 존재하지만, 영화 전체를 장악하며 감정의 중심을 잡아줍니다. 저는 이 영화가 관객에게 '사랑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제시한다고 생각합니다. 꼭 같은 공간에 있어야만 사랑일까? 눈을 마주치지 못하면, 만질 수 없다면, 그 감정은 가짜일까? 허는 이런 물음에 대해 직접적인 답을 내리기보다는, 감정의 결을 통해 천천히 사유할 수 있도록 유도합니다. 영화가 끝난 후, 저도 한동안 말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여운이 아니라, 영화를 통해 마음 깊은 곳을 건드린 감정 때문이었습니다. 허는 그런 영화였습니다. 아주 조용하지만, 누구보다 깊이 감정을 흔들어 놓는 영화. 저는 이 영화를 통해 사랑에 대해, 인간에 대해, 그리고 저 자신에 대해 더 많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