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패터슨이라는 영화는 오랜만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영화를 끝까지 몰입해서 본 경험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자극적인 장면도, 극적인 반전도 없는 구성에 낯설게 느껴졌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화면 속에 펼쳐지는 평범한 일상이 조금씩 특별하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짐 자무쉬 감독 특유의 절제된 연출과 무심한 듯 담담하게 흘러가는 장면들 속에서, 어느새 저는 주인공의 일과를 함께 따라가며 그의 감정에 동화되고 있었습니다. 뉴저지 주의 도시 패터슨에서 살아가는 버스 운전사 ‘패터슨’의 일주는 지극히 단조롭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출근하고, 퇴근 후 아내와 시간을 보내고, 산책을 하고, 동네 펍에서 맥주 한 잔을 마시는 일상의 반복. 하지만 그 안에 시가 있었고, 사랑이 있었고, 우리 모두가 지나치는 삶의 본질이 담겨 있었습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도 한참 동안 여운이 가시지 않았고, 저는 내 일상 속에도 이런 ‘시적인 순간’들이 있었는지 곱씹게 되었습니다.
1. 일상이 시가 되는 공간, 영화 패터슨이 전하는 시간의 미학
패터슨은 하루하루가 얼마나 시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대부분의 영화가 갈등과 사건으로 중심을 세우는 데 반해, 이 작품은 오히려 갈등을 의도적으로 배제합니다. 주인공 패터슨은 버스 운전사로 일하며, 점심시간에는 도시락을 먹고 조용히 시를 씁니다. 그는 아주 단순한 삶을 살고 있지만, 그 안에는 반복과 균형, 사소한 감정의 진동들이 고요하게 울려 퍼집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며 '단조로움'이라는 단어가 결코 부정적인 의미만은 아니라는 것을 새삼 느꼈습니다. 영화 속에서 패터슨은 늘 같은 길을 걷고, 같은 시간에 일어나고, 같은 풍경을 바라보지만, 그의 시선은 늘 새롭습니다. 그는 매일 같은 도시의 사람들을 보며도 전혀 지루해하지 않고, 오히려 그 속에서 자신만의 시적 감각을 발견합니다. 특히 시를 쓰는 장면에서는 화면에 자막으로 그의 글이 직접적으로 펼쳐지는데, 그 표현은 화려하지 않고, 오히려 아주 일상적인 언어로 구성되어 있어 더욱 진솔하게 다가옵니다. 예를 들어, 성냥에 대해 쓰는 시 한 편조차도 사랑의 감정으로 연결되며, 우리는 그 사물 안에서 사람의 감정과 온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런 방식은 우리가 당연하게 여겼던 일상적 사물에 대한 시각을 새롭게 만들어줍니다. 저는 영화를 보며 제 주변의 사소한 사물들, 매일 오가는 길,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던 표정들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고, 그 모든 것이 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묘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감독은 말합니다. “삶 자체가 이미 시다.” 저는 그 말에 깊이 공감하게 되었고, 이 영화가 단지 스토리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감각을 따라가게 만드는 작품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무엇보다 영화는 시를 문학의 형태가 아니라 ‘감정의 태도’로 바라보는 방식이 인상 깊었습니다.
3. 침묵과 열정이 공존하는 사랑의 형태
이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축은 패터슨과 그의 아내 로라의 관계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정반대의 성향을 가진 두 인물처럼 보입니다. 패터슨은 차분하고 묵묵하며 내면을 중시하는 인물이고, 로라는 외향적이고 창의적이며 새로운 시도를 즐깁니다. 그녀는 매일 집 안을 꾸미고, 새로운 요리를 하고, 기타를 배우고, 컵케이크 사업을 꿈꿉니다. 처음엔 다소 과해 보일 만큼 밝고 낙천적인 그녀의 모습이 익숙하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긍정 에너지가 패터슨의 삶에 얼마나 소중한 균형이 되어주는지 깨닫게 됩니다. 특히 인상 깊었던 장면은 로라가 패터슨에게 시를 공개해보는 건 어떠냐고 권유하는 대목입니다. 그녀는 그의 재능을 진심으로 믿고 있고, 그것을 세상에 보여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하지만 패터슨은 조용히 웃으며 말을 아낍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둘 사이의 사랑이 단지 말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깊은 신뢰와 인정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걸 느꼈습니다. 로라는 패터슨에게 끊임없이 새로운 시각을 제안하고, 패터슨은 그 열정을 조용히 지지합니다. 이들은 서로를 바꾸려고 하지 않습니다. 대신 각자의 방식으로 상대방을 존중하며 살아갑니다. 요즘 많은 영화들이 사랑을 격정적이고 드라마틱한 갈등으로 그리는 반면, 패터슨은 일상 속 관계의 평온함을 통해 오히려 더 현실적이고 깊은 감정을 전달합니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패터슨이 시를 잃어버린 뒤, 일본인 시인과 만나 새로운 공책을 건네받는 장면은 매우 상징적입니다. 그것은 새로운 시작이자, ‘사라짐’에 대한 위로이며, 관계에 대한 은유이기도 합니다. 저는 그 장면에서 큰 울림을 느꼈고, 누군가의 믿음과 지지는 결국 한 사람의 삶을 지탱해주는 가장 큰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3. 짐 자무쉬 감독의 철학, 일상을 예술로 바꾸는 시선
짐 자무쉬 감독은 이번 패터슨에서도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고하게 보여줍니다. 그는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이야기를 설명하거나 감정을 과도하게 연출하기보다는, 관객에게 '느끼는 시간'을 제공합니다. 자무쉬의 영화는 종종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영화’로 불리곤 하지만, 사실 그 ‘아무 일도 없음’ 속에 수많은 감정이 응축되어 있습니다. 패터슨에서 그는 극적인 갈등이나 큰 서사를 배제하고, 인물의 작은 변화와 감정의 떨림, 반복되는 하루 속 미세한 차이를 통해 삶의 깊이를 보여줍니다. 저는 그의 카메라가 바라보는 방식이 너무도 따뜻하고 인간적이라고 느꼈습니다. 무언가를 증명하려 하지 않고, 그냥 바라봐주는 방식. 그것이 자무쉬 감독 영화의 진짜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이 영화에서는 도시 패터슨 자체가 하나의 살아 있는 인물처럼 느껴졌습니다. 이 도시는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라는 시인을 배출한 실제 도시이기도 하고, 영화 속에서도 그 시인의 작품이 자주 언급됩니다. 도시는 시처럼 말이 없지만, 분명한 감정과 온도를 가지고 있고, 패터슨은 그 안에서 조용히 자신의 세계를 쌓아갑니다. 또한 영화의 리듬은 굉장히 절제되어 있어서, 빠른 편집과 과한 설명에 익숙한 현대 관객에게는 다소 낯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낯섦을 넘어서면, 깊은 안정감과 사색의 시간이 찾아옵니다. 자무쉬는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것’보다 ‘보게 하는 것’에 집중합니다. 영화를 통해 ‘시를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 ‘예술이 삶과 어떻게 닿아 있는지’를 조용히 탐색하게 만들죠. 영화가 끝나고 극장을 나설 때, 저는 ‘지금 내가 살아가는 이 평범한 일상도 누군가에겐 충분히 시가 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패터슨은 관객에게 어떤 결론도 주지 않습니다. 대신 아주 조용한 목소리로 묻습니다. “당신의 하루는 어떤가요?” 이 물음 하나가 제가 이 영화를 잊지 못하게 만드는 이유입니다.